법치는 중요한 사회적 기술로 나라의 흥망까지 좌우한다. 그것이 국민의 에너지를 증가시키기도 하고 억제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법치는 인류의 역사발전에 많은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신분제 해소, 기본권 보장, 재산권 확립, 사회의 질서유지, 공성성의 기준 설정, 부패방지, 미래에 대한 예측 가능성 등 신뢰 사회 건설을 위한 기초를 세워 사회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잘못된 법률이나 잘못된 법 운영은 나라를 망치기도 한다.
올바른 법치를 이루기 위해 주권자인 시민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 시민주권이 법치개혁을 이룬 의미있는 역사적 사례를 그리스, 로마, 영국, 미국, 프랑스의 경우를 들어 살펴본다. 현재 사법의 정치화와 정치의 사법화 등 파행을 겪고 있는 한국 법치의 올바른 개혁 방향도 생각해 본다.
나라의 흥망을 가른 아테네와 로마의 시민법
아테네는 잘못된 시민법으로 청년인구가 줄어들고 반대로 해방노예제를 도입한 로마는 청년인구가 늘었다. 아테네의 전성기 참주 페리클레스(Perikles, BC495년경-429)는 “아테네 시민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경우만이 아테네 시민이다” 라는 시민법을 제정하여 시행하였다. 그 후 아테네 청년인구가 줄어들어 점차 쇠퇴하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패인이 되었다. 아테네 쇠퇴기 청년인구는 총인구 43만3천명중 4만명으로 10% 미만이었다. 이에 비해 공화정기 로마시 청년인구는 11만명으로 전체인구 44만명의 25%나 되었다. 아테네 시민법은 인구를 감소시켜 나라를 망치게 한 반면 로마는 정복전쟁에서 잡아온 노예라도 주인이 인정하면 자유인으로 해방시킬 수 있는 해방노예제를 실시하였다. 패전국이라도 우수한 사람에게는 시민권을 부여하고 심지어 원로원으로도 받아들이는 패자 동화정책을 시행하였다. 이것이 사회의 에너지를 증가시켜 로마를 오랫동안 번성하게 한 요인이었다.
끊임없는 평민의 항거로 시민법 개혁-공화정기 로마법
로마를 부흥시켰던 공화정기에 끊임없는 평민의 항거로 시민법이 제정되고 시민권을 높이는 법 개정이 계속 이루어졌다. BC495년 시민들의 몬스 사케르 성산 항거가 그 시작이었다. 정복전쟁에 참여한 시민들은 전리품 분배의 불공정성, 과도한 조세납부 등에 항거하여 1년 이상 성산에 올라 내려오질 않았다. 결국 거부권 등 막강한 권한을 가진 시민 호민관 선출과 시민으로 구성되는 민회를 얻어내고 산에서 내려왔다. 로마 공화정 시작후 반세기 만인 BC451-449년에는 평민의 요구로 ‘법제정 10인관’이 설치되어 12표법이라 불리는 시민의 평등, 재산권 보호, 동해보복(同害報復)의 원칙, 공정한 재판 절차(due process 도입) 등을 포함한 포괄적 성문법을 제정하였다. 그 후에도 시민의 항거로 리키니우스 법(BC367)에 의해 집정관 1명을 평민으로 선출하게 하고, 호테르니우스-섹스티우스 법(BC287)에 의해 민회 결정사항을 로마국법으로 인정하여 귀족에게도 적용하는 성과를 거두어 로마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처럼 시민의 항거로 신분상, 경제상 그리고 권력 행사에 있어서 시민의 권한이 점점 상향되는 일련의 법률 제 개정 과정이 바로 로마법 형성의 특징이다. 그러나 BC1세기 이후 제정 초기에 공화정의 법률 대신 황제의 칙령을 최고 법으로 하는 독재 시대로 바뀌면서 호민관의 권한 상실, 평민의 소외, 부패의 증가 등으로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법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시민권을 얻어낸 프랑스 대혁명(1789)은 왕족과 성직자 등 제1계급과 귀족 등 제2계급에 대하여 인구의 98%를 차지하는 제3계급인 평민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평민의 과도한 세금 부담에 비하여 면세특권을 가진 제1, 제2계급에 대하여 자유 평등을 주장하면서 일으킨 혁명이었다. 우여곡절의 혁명과정을 겪은 후 개인의 기본권과 재산권에 대한 상세한 규정을 만든 나폴레옹 법을 탄생시켰다. 이법 제정 과정에서 나폴레옹이 시작부터 내용 정리의 전 과정에 깊숙이 간여하였다.
모든 프랑스인의 평등권과 만인의 법 앞에 평등, 재산권, 신앙의 자유, 경제활동의 자유 등 근대적 시민주권의 가치들을 담았다. 나폴레옹 법전은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이어 받고 로마법, 프랑스의 관습법, 봉건법 등을 통일시킨 근대 최초의 시민사회의 법전으로 민법, 형법, 절차법, 상법, 범죄법(code of criminal instructructio) 등 5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르네상스에서 태어난 근대적 개인의 자유권, 평등권을 법적으로 완성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견제와 균형 제도 확립-영국의 대헌장에서 명예혁명까지
영국의 1215년 대헌장은 존왕과 귀족 성직자 들의 대립으로 만들어진 협약이다. 런던에서 전투까지 벌였지만 결국 귀족과 성직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존왕은 러니미드에서 대헌장에 서명하였다. 대헌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로써 대주교, 주교, 사제, 수도원장 및 이 왕국의 제후들에게 다음과 같은 특권을 인정한다.” “일반 평의회의 승인없이 군역 대납금과 공과금을 부과하지 못한다.”(제12조) “모든 자유민은 동등한 자격을 갖는 사람들의 법률적 판단이나 국법에 의하지 않고는 구속되거나 재산을 몰수 당하지 않는다.”(제39조) 대헌장은 바로 귀족과 성직자의 자유와 재산권 등 특권을 왕과의 투쟁으로 얻어낸 것이었다.
대헌장은 영국 권력분립의 초석이 된 의회제도를 이끌어 냈다. 존의 아들 헨리 3세 때 까지도 평의회의 소집 권은 여전히 국왕에게 있었다. 왕이 대헌장을 지키지 않자 왕과 귀족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1258년 15명의 귀족이 스스로 모여 공식 회의기관을 만드는데, 이것이 인류 최초로 등장한 ‘의회’ (Parliament)다. 여기에서 “국왕은 모든 결정에 대해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라는 옥스퍼드 조례를 발표하였다.
그후 400여년간 소지주 상공인 등 시민이 의회 구성원으로 참여하여 왕권과 수 없는 대립과 싸움 끝에 1688년 명예혁명으로 권리장전을 성사시킨다. 명예혁명 후 의회가 왕권보다 우선한다는 원칙을 법률로 확정하는 권력분립을 이루었다. 의회발전에 있어서 획기적 성과였다. 왕의 재판 간여 제한 등 사법권의 독립도 진전되었다. 조세 및 무역에 대한 국왕의 독점권을 제한하고 사유재산권 제도를 확립하여 세계 최초로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하였다. 명예혁명 후 40여년이 지난 시기 영국에 3년간 (1726-1728) 체류하였던 볼테르가 “영국 국민은 왕권에 저항함으로써 왕권을 규제하기에 이르렀고, 노력을 거듭해서 마침내 이런 현명한 정부를 수립한 지구상의 유일한 국민이 되었다.” 라고 <볼테르의 편지>에서 쓰고 있다. -0
견제화 균형원칙 미국헌법에 도입
미국은 독립선언서에서 국민의 생명, 자유, 행복추구권 등을 천부적 기본권이라 선언하고 미국의 독립헌법에 권력분립을 구체적으로 반영하였다. 삼권분립을 헌법에 명시함으로써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의 상호 견제를 확실히 하고, 외교 안보 등 권한을 가진 연방정부와 기업설립허가, 종교와 교육, 국민의 건강 안전 복지와 조세권을 주정부에 위임하는 권력분립을 이루었다. 하원과 상원의 양원제를 도입하여 다수와 소수의 견제와 균형도 이루었다. 그 후 ‘견제와 균형 원칙’을 근간으로 하는 헌법이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법 집행의 편파성 등 사법의 정치화는 시민주권이 막아야
한국은 25.12.3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에 이어 조기 대선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뿌리 깊은 권력 카르텔이 사법 행정 등 곳곳에 잠복하여 국민의 참정권 등 기본권을 제한하려 하고 있다. 사법절차의 편법 운영으로 정치에 간여하는 등 사법의 정치화까지 나타나고 있다. 견제와 균형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이를 시정하여 권력 카르텔에 의한 독재를 막고 진정한 3권분립이 가능하도록 세밀한 제도를 구축하여야 한다.
이것도 역시 시민이 바로 잡아야 하는 것임을 역사가 가르치고 있다. 로마에서 영국에서 프랑스에서 미국에서 보여준 시민의 법치 운영 바로잡기 사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고 우리가 4.19 혁명에서 6.10 항쟁까지 여러 차례 경험한 민주화 경험이기도 하다.
[출처] 시민이 이끌어낸 법치개혁의 역사 / 前 공정거래위원장, 대통령 직속 규제개혁위원회 공동위원장|작성자 lkkts